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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025의 게시물 표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면?

 이번에 큰 일을 겪고난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새 삶을 얻었다고 생각하라고 많이들 격려해 주었다. 새 삶이라, 지금까지 한번도 염두에 두지 않았던 주제라서 갑자기 나에게 다가오니 다소 어색하긴 하다. 사고가 있은지 한달이 지났고, 그 사고 전과 다른 부분은 생각할 시간이 많이 주어졌고, 그리고 생각을 많이 하려고 하는 것도 있다. 어떻게 새 삶을 살아야 올바른 삶이 될 것인지에 대하여도 나름 생각의 지분을 나누어서 틈틈히 되뇌이곤 하였으나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고, 뭘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가끔 새 삶을 산 사람들의 변천사 같은걸 TV나 인터넷글에서 본 기억이 얼핏 있는데 거기에 나오는 대단한 사람들의 대단한 이야기처럼 큰 변혁이 있는 삶은 어려울 것 같고, 그리고 아쉽게도 지금의 나는 다소 기력이 떨어진, 의욕이 엄청 앞서지는 않은 40대의 아저씨가 되어 버려서 어쨌거나 무리한 삶은 어렵지 않나 싶다. 다행일지 아니면 다행이 아닐지는 모르겠으나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히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해왔어서 지금에 와서 아.. 예전에 못했던 걸 해보자 하는 다소 충동적인 삶의 욕구는 따로 없고, 그리고 예전에 못이룬 꿈을 이제와 다시 실현시켜보자 하기에도 예전의 꿈들은 지금에 와선 그리 매력적이지 않은 목표들이 되었다. 혹은 지금 다시 하기에는 늦은 감이 있지 않나 싶다. 10대에는 꿈이 남을 웃기는 사람 혹은 요리사였는데 남을 웃기는 사람은 내 자신이 딱히 남을 웃길 수 있는 재능이 거의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닫게 되어 아주 멀리 떨어진 꿈이 되었고, 요리사는 40대가 될 때 까지 요리를 해오며 내가 요리하는 것 보다 남의 음식을 먹는게 더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아주 어린 시절의 꿈들은 이제 놓아줘야할 듯 하다. 20대에 꾼 3가지 꿈들 중 2가지는 얼추 이루었고, 마지막 1가지인 호스텔 사장은 나름 카우치서핑을 하면서 비슷하게 충족을 시켜 주었고, 그리고 숙박업 또한 참 힘들구나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어 이것도 이제 안녕을 고해야 한...

달리기는 어째서?

 처음 달리기를 시작한건 독일에 와서 얼마 되지 않았을 시기였다. 건조한 독일 날씨에 몸이 적응을 못해서 그런가 추운 겨울에 온몸이 가렵기 시작하였다. 조금만 몸의 온도가 올라가도 몸에서 열꽃이 퍼지고 가려워서 견딜 수 없었다. 독일이라는 나라가 나와 맞지 않는구나 싶다가도 굴복하지 말고 견뎌내고 싶었다. 여러가지 실험을 하다가 보니 몸에서 열을 방출하지 않고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가려워진다는 나만의 나름의 괴변이 생겼다. 실제로 뛰면서 땀을 엄청 나게 되면 후에 하루이틀간은 가렵지가 않았고, 그래서 겨울이 되면 계속 뛸 수 밖에 없었다. 2015년에 담배를 끊게 되었다. 담배를 끊은 다음에 내 심폐력은 어느 정도까지 돌아가는지가 궁금했다. 그래서 2016년에 마라톤을 뛰어 보기로 하였다. 그래도 나름 20살부터 꾸준히 운동을 해와서 그런지 마라톤은 수월하게 완주를 하게 되었고, 그 후에는 뭔가 의무적으로 일년에 한두번은 건강을 위해 뛰어보자는 다짐을 하였다.  달리기는 시작도 힘들지만 뛰는 순간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다. 아무런 동작의 변경없이 계속되는 동작의 반복이었고, 다른 운동처럼 다이나믹한 부분도 없어서 매 순간 지루해하였고 그걸 참고 견뎌야하였다.  달리기 모임에 들어가면서 비슷한 환경에 비슷하게 운동하는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이전처럼 혼자 뛰는게 아니라 누군가와 같이 뛰게 되면서 지루함은 많이 상쇄가 되었고, 달리기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언젠가 저들처럼 이 운동을 즐길 수 있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가 생겼다. 그렇게 또 몇해가 지나다가 코로나가 터졌다. 밖에 나가기가 부담스러워지면서 점점 운동에서 멀어졌던 것 같다. 스무살부터 시작해 거진 20년을 하던 검도에 대해서도 다시 시작하게된 때가 그쯤이다. 그러다 어느날 우연히 점심을 먹으러 간 장소에서 같은 모임의 사람들이 풀마라톤을 마치고 식사를 하러 들어왔다. 내가 이렇게 움츠려들고 움직이지 않았을 동안 계속해서 달려오던 그들을 보며 약간이나마 마음속...

자식 자랑

 지금 내가 입원해 있는 병원은 침대가 세개 놓여있는 병원으로, 지금까지 들러본 프랑크푸르트의 병원 중에 가장 최악의 병원이다. 날씨도 꿉꿉하고 다들 씻지도 않아서 냄새가 최악일 듯 하지만 다행히 최근에 감기에 걸리고난 이후에 냄새를 맡을 수 없어서 꽤나 지낼만하다. 음식 역시 그동안 와이프 대신에 먹었던 병원밥 중에 최악을 달리지만 그또한 건강한 음식을 먹는거야 하고 셀프최면을 걸어보니 또 나름대로 건강식으로 탈바꿈을 하게된다. 언제나 정신승리는 위대한 것이다. 다른 두명의 환자는 각각 아프가니스탄, 코소보 출신의 할아버지들인데 독일에 참 오래들 사셨다. 코소보 할아버지는 내 아버지와 같은 연배로, 병원에 오래 있는걸 극도로 싫어하고 병원밥을 끔찍히 싫어하신다. 우리가 하루 여기에 숙박하면 병원이 인당 600유로를 받는다는데 정말인가? 아프가니스탄 할아버지는 육십대분인데 증상이 나와 비슷하고 이전에 이미 같은 병세로 입원을 한 전적이 있는 분이다. 조용조용한 성격이라 많은 대화를 나누진 않았다. 두사람의 공통점은 우선 무슬림이고, 둘째는 자식자랑이 엄청나시다는 것이다. 새로운 간호사가 오면 처음에 간단히 인사를 한 다음에 자신의 인적사항을 구구절절하게 이야기해 주신다. 자식은 몇이고, 자식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고 등등. 그런데 그게 단어 하나 안틀리고 거의 동일하게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나도 다음엔 어떤 이야기가 나오겠거니 하고 짐작이 간다.  다행히 간호사들은 친절하게 좋은 쪽으로 반응들을 해줬고, 할아버지들도 뭔가 내 인생은 틀리지 않았어 하는 흡족한 얼굴로 간호사들과의 대화 후에 침대에 얼굴을 묻으신다. 본인들의 삶의 이야길 들으면 그게 더 대단한거 같은데 자기가 이룬 것보다 자기 자식들이 이룬 것들이 더 찬란하게 빛나나 보다. 자식자랑은 한국이나 다른 나라나 다 똑같거니 싶다. 누군가에게 내 자식들이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 거리는 것은 본능인가 싶다. 과거에는 내 부모님이 남 앞에서 내 자랑을 하시는게 너무 낮...